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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세계문학]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by 뫼비우스토리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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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35년 동안 마음속에 품어 오던 이야기를 17년에 걸쳐 완성해 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워털루 전쟁, 왕정복고, 폭동 등 프랑스의 19세기를 관통한 역사적 격변이 생생하게 담긴 역사 소설입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의 지난한 삶과 한을 담은 민중 소설이기도 하며, 사상가이자 시인으로서의 철학과 서정이 담긴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와 주제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나 다름없으며, 인간 삶과 세상을 아우르는 모든 것이 이 작품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 만큼 『레 미제라블』은 출판 이후 오늘날까지 백오십 년간 놀랄 만큼 왕성한 생명력으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골 일꾼 장 발장이 가족을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치다 붙잡혀 19년에 걸친 감옥살이 끝에 석방된다는 '장발장 이야기'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리엘 주교를 만나 개과천선한 장발장은 팡틴, 코제트와 같은 또 다른 '레 미제라블'을 만나며 베푸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말 그대로 “한 저주받은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성인이 되고, 어떻게 예수가 되고, 어떻게 하느님이 되는”지를 그려낸 이 기나긴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연령, 계층, 직업을 망라하여 각자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장발장을 의심하고 추적하는 자베르 형사, 혁명을 꿈꾸는 앙졸라, 속물적인 욕심이 돋보이는 떼나르디에 부부 등 각종 인물들은 저마다의 설득력을 가지며 매력을 더합니다.

 

 

 

『레 미제라블』은 1862년 3월 30일에 처음 출간되자마자 브뤼셀과 파리의 서점들이 이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출간 후 채 일주일도 못 된 4월 10일, 1쇄가 매진되었습니다.

 

이러한 『레 미제라블』의 인기는 현지뿐만 아니라 각국의 번안 및 번역 도서로도 이어졌습니다. 나아가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재탄생했습니다.

 

1980년 파리에서 최초로 공연된 후 1985년 런던으로 이어진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큰 성공을 거두어 뮤지컬 「캣츠」의 기록을 깨고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공연되었습니다.

 

또한 1957년 장 가방 주연, 1995년 장 폴 벨몽드 주연, 그리고 2012년 휴 잭맨 주연의 영화까지 무려 스무여 번이나 영화화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줄거리

무식하고 가난한 시골 일꾼 장 발장은 조카들이 굶어 죽을 처지에 놓여 빵 한 덩어리를 훔치다가 무려 십구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석방됩니다.

 

출소 후 좌절과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 또다시 절도와 살인의 유혹에 빠지지만, 촛대를 훔치려던 자신을 용서해 준 미리엘 주교에게 깊이 감명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어느 도시에 공장을 세워 사업에 성공한 방 발장은 팡틴이라는 가엾은 여인과 그녀의 딸 코제트를 비롯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결국 시장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그러나 집요한 형사 자베르는 장 발장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그를 쫓습니다.

 

 

 

작가 소개-빅토르 위고

1802년 2월 26일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지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습니다. 

 

일찍부터 고전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샤토브리앙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습니다. 

 

1819년 열일곱의 나이로 평론지 《르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를 창간하고, 1822년 첫 시집 『송가와 다른 시들』을 발표하며 계관시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운문 희곡 「크롬웰」(1827)과 「에르나니」(1830)를 통해 진정한 낭만주의 작가이자 자유주의자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831년 『파리의 노트르담』을 펴내며 소설가로서 명성을 굳혔고,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의 집권을 기념하는 시 「1830년 7월 이후」를 발표한 후부터 수많은 정치 시를 발표하며 정치적 참여 시인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84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히고 1845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문학적 업적을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왕당파에서 철두철미한 공화주의자로 변신하여 루이 나폴레옹과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20여 년의 망명과 추방 생활 동안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차례로 잃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식지 않는 창작열로 또 다른 대작 「레 미제라블」(1862)을 발표하여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1870년 예순여덟의 노구로 파리에 귀환하여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말년에 살았던 파리의 엘로 거리는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빅토르 위고 거리’로 개칭되었습니다.

 

1885년 5월 22일 향년 83세로 별세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예우했으며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G. 랑송)라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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