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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세계문학]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부활>

by 뫼비우스토리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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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부활

『부활』은 톨스토이가 일흔이 넘어 완성한 만년의 역작으로 고골, 푸쉬킨, 도스토옙스키를 아우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대한 오마주이자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와도 맞닿는 인간과 구원에 대한 최종적인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19세기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종교적인 모순을 지적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정신적인 ‘부활’을 향한 미약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미약한 불빛을 과장하는 대신 파편적이고 불안정한 실체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뜨거운 비판과 애정을 드러냅니다.

 

 

 

소설에서,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선 카츄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합니다. 대학생 시절의 공작은 카츄샤를 향해 순수한 애정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다른 남성들에게서 배운 대로 카츄샤의 감정과 육체를 마음대로 다룬 후 그녀에게 돈을 찔러 주었으며, 그 후 캬츄샤는 인간에 대한 불신 속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카츄샤는 법정에서조차 무책임한 법조인과 배심원들로 인해 죄도 없이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오랜 시간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과 함께 카츄샤를 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 기관들을 방문하면서 점차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락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고 잘못된 판결 앞에서 미안해하지 않는 재판장과 검사보, 사건의 진실이 아닌 절차의 정당성 여부만을 무심히 따지는 원로원 의원들, 무더운 날에 장시간 도보 이동을 시켜 허약한 죄수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죄수들을 똥물 위에서 자도록 방치하는 호송병들…….

 

이들은 특별히 가학적이거나 흉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그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상관과 국가에 맡겨 버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양심에 귀를 기울이거나 스스로 사유하거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은 두 인물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의 개인적인 타락에서 시작해 법과 제도, 토지 문제, 종교 등 사회의 광범위하고 고질적인 타락으로 시선을 넓힙니다.

 

 

 

톨스토이는 정부로부터 억압받는 두호보르 교도들을 돕기 위해 『부활』을 집필했다고 전해집니다.

 

두호보르교는 18세기부터 러시아에 존재한 그리스도교 종파로 교회를 부정하고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거부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정부가 이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학대와 폭력이 자행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톨스토이는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등 폭력을 멈추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특히 그는 1881년 이후 저술한 작품에 대해 저작료를 받지 않기로 한 원칙을 깨고 집필 중이던 『부활』을 필사적으로 마무리해 주간지 《니바》와 선금 1만 2000 루블에 출판 계약을 맺어 그 돈을 전부 이주비에 보탰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집필 과정부터 인간 사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지만 그럼에도 선한 영향력을 믿었던 톨스토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한 만년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거리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선 카츄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합니다. 대학생 시절의 공작은 카츄샤를 향해 순수한 애정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다른 남성들에게서 배운 대로 카츄샤의 감정과 육체를 마음대로 다룬 후 그녀에게 돈을 찔러 주었으며, 그 후 캬츄샤는 인간에 대한 불신 속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카츄샤는 법정에서조차 무책임한 법조인과 배심원들로 인해 죄도 없이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네흘류도프는 오랜 시간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과 함께 카츄샤를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작가 소개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년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44년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나 대학 교육에 실망,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로 가서 군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듬해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습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하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습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습니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습니다.

 

사유재산 및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영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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